7인회의 실질적 수장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재무장관을 지낸 최측근인 김용환 전 장관으로 알려졌다. 실제 7인회 멤버 중 선대위 고문단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사도 김 전 장관이었다. 김 전 장관은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쳐 재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1980년 신군부의 ‘숙정’ 대상에 올랐다가 13대 총선에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충남 보령에서 당선된 이후 내리 4선을 했다.
JP의 최측근으로 DJP연합 출범 당시 핵심적 역할을 했던 그는 1999년 자민련을 탈당했고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충청권에서 약진하는데 톡톡히 한 몫 한 그에 대한 박 전 위원장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김 전 장관은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원내대표 경선과정에 이 원내대표와 러닝메이트를 형성해 정책위의장에 입성한 진영 의원을 격려 방문한 것도 김 전 장관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다.
박 전 위원장을 위한 친목단체 ‘상록포럼’ 상임고문이기도 한 김 전 장관은 박 전 위원장이 현정부 실세인 이재오 의원과 정운찬 전 총리 등과 대립각을 세울 때면 날 선 발언으로 상대를 공격하며 막후에서 박 전 위원장을 든든히 도와주는 역할을 해봤다.
또한 재작년 말부터 박 전 위원장에게 (좌클릭) 정책기조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해왔으며 평소 “박근혜 시대가 올 것이라 굳게 믿는다”는 말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병렬 전 대표는 유신시대 <조선일보> 정치부장 출신으로 5공 출범 직후 편집국장을 거쳐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제12대(민주정의당), 제14대(민주자유당), 제15대(신한국당), 제16대(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디도스 사태의 최구식 전 의원과 BBK 검사로 유명한 최재경 검사의 삼촌으로도 유명하다. 별명은 히틀러에서 따온 ‘최틀러’다.
청와대와 정계의 요직을 거쳤고 관선 서울시장도 지낸 그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진두지휘한 한나라당 대표였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탄핵역풍을 맞고 17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정치권에서 사라졌다가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박 전 위원장을 지지하며 복귀했다.
탄핵정국 당시 최 전 대표의 후임자로 박 전 위원장이 바통을 이어 받기도 했다.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은 유신 시절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 당시 박 전 위원장과 교분을 튼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냈고 ‘친정’의 ‘편파보도’에 격분하기도 했다.
현재는 도서출판 ‘기파랑’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기파랑은 보수단체 뉴라이트가 출간한 대안교과서의 출판사이기도 하다.
안 전 부사장은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 신청을 했었으나 박 전 위원장을 도왔단 이유로 찬밥 대접을 받기도 해 박 전 위원장이 늘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검찰총장을 지낸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은 중앙정보부 파견 검사 시절 유신헌법 제정의 실무를 담당한 전력을 지닌 인물이다.
정수장학회의 장학생이기도 했던 그는 박정희 정권 당시 법무부 과장으로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15대~17대 3선 의원으로 1992년 법무부 장관 재직 당시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을 조장해 여당 후보를 지원하는 내용을 의논했던 ‘초원복집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오히려 이 사건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런 전력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낙선대상으로 지목됐다.
김 전 장관 역시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로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탄핵 심판 시 일종의 검사역할을 했다.
김용갑은 육사 17기로 소령 예편한 후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근무했으며 5공화국에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6공화국에서도 총무처 장관과 민정수석을 역임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직선제 수용’을 주장한 인물이다.
5공 경력이 자랑스럽다는 자칭 원조보수로 ‘우익의 기수’ ‘대변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5~17대 3선 의원으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하며 은퇴했다.
현경대 전 의원은 박 전 위원장의 외곽조직인 ‘한강포럼’을 주도한 인사로 지난 2008년 총선에서 낙천되자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박 전 위원장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탈당 전력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복당이 승인됐고 공천장도 땄지만 결국 또 낙선했다. 박 전 위원장이 정계에 입문할 당시 여러모로 조언을 해주며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이번 4.11 총선에서 6선에 오른 강창희 당선자(대전 동구)의 경우 19대 전반기 국회의장이 유력시 되는 인물이다.
육사 25기 하나회 출신으로 신군부의 막내 격인 강 당선자는 1980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이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출처] 박근혜 멘토단 7인회|작성자 남쪽나라
우병우 민정수석 후임으로 최재경 BBK검사를 임명했다고 알려지고 그는 최병렬씨의 조카라고 한다.
태음인 체질의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는 이렇게 항상 그 때 그 사람들과 그 인연으로 엮인 사람들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할 때에 편안한 사람들이란 오래 봐온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수신문마저 등돌리고 여당의원들 중에서 탄핵을 주장하는 국회의원이 나올 지경이 되었을까? 그것도 '친박좌장'이라고 불리던 사람들까지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람들 볼 때 능력이 있나 없나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있을 만큼 자신과 함께 한 시간이 충분한가? 만을 위주로 보는 태음인 성정을 타고 났기에 국가 전체를 보는 시각보다는 개인의 입장에서 공유한 시간이 긴 사람들만을 믿고 있다가 이렇게 허망하게 국가와 정치, 그리고 경제를 도탄에 빠뜨린 것이 아닌가?
최순실 관련하여 문제가 된 사업들이 신성장동력이라는 것이 '스포츠산업' 관련이다. 이것이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신성장 동력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다시한번 묻게 된다.
시건방춤에 로열티를 주었다는 가수 싸이가 창조경제의 모범이라고 하는 것 또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을지
이 난국을 대하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역시나 그 때 그 사람들의 장막 속에 숨으려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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